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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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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의 역사

금속활자는 활판 인쇄를 하기 위해 쇠붙이를 녹여 주형에 부어 만든 각종 크기의 활자이다. 금속활자는 활자를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의 성질에 따라 석활자, 연활자, 동활자, 철활자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속활자라고 하면 그 재료로 만든 활자를 총칭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비교적 일찍 발명되었던 교니활자 인쇄술과 목활자 인쇄술의 활자 제작 기술을 도입한 우리나라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보다 먼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목판 인쇄술이 성행하여 전반기에는 불교와 유교의 양대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되고 문물제도가 잘 정비되었으나, 후반기로 접어들어 인종 때에는 이자겸과 묘청의 난이 있었다. 또한 의종과 명종 때에는 무인의 난이 일어나 문신들이 대거 학살되고 궁궐이 불타, 그 동안 여러 전각에 가득 비치해 놓았던 귀중한 전적들이 모두 소실되는 등 문운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난세가 수습되기 시작한 것은 최충헌 일족이 무신정치의 토대를 잡은 13세기 초부터였다. 무신정치가 토대를 구축하기 시작했으나, 서적의 간행은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아주 긴요한 서적에 한하여 서연의 유신들이 본문을 바로잡아 지방의 관서나 서경의 여러 서원에 나누어 보내 목판으로 새기게 하여, 그 책판을 중앙의 서적점에서 관리하면서 요청에 따라 서적을 인출하여 공급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이에 무신정치의 기틀이 완전히 잡히고 세태가 안정되어 서적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으나. 그 동안 워낙 많은 서적들이 불에 타고 탕진되어 비용과 시간이 많이 걸리는 목판 인쇄술로는 필요한 서적의 수요를 도저히 공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어서 독서나 학문하는 사람이 한정적이었다. 그리하여 서적에 있어서도 그 부수는 적으면서 학문의 여러 주제 분야의 필요한 서적을 수시로 인출하여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청동을 불려 범종, 불상, 동전 등을 주조하는데 훌륭한 기술을 체험해 왔으므로,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조판용의 점착성 물질과 금속에 잘 묻는 먹물만 개발하면 금속활자 인쇄술은 충분히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필요성과 그에 부합되는 여러 가지 조건, 그리고 전통적 기술의 바탕 위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창안되고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금속활자 인쇄술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떤 방법으로 금속활자가 주조되고 인쇄되었는지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우리 민족은 13세기 초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하였다. 지금까지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중에서 실물이 전해지는 것은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려 『복(?)』 활자와 고려의 왕궁이 있었던 개성 만월대 신봉문에서 출토된 개성박물관 소장의 고려 『전(?) 』 활자가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안된 것이어서 금속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미숙하였다. 금속활자의 주조에 있어서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자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획이 나타나지 않아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조판술에 있어서도 사주와 계선까지 고착된 인판틀에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무리하게 배열하였기 때문에 옆줄이 맞지 않고 위아래 글자끼리 획이 엇물리거나 각 줄에는 글자의 출입이 있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술은 고려시대의 그것에 비하여 발전되고 향상된 것이었다. 계미자는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여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와 같이 미숙하였으나, 갑인자 이후로부터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훨씬 향상된 금속활자 주조술과 조판술을 바탕으로 보다 발전된 금속활자 인쇄술을 구가하였던 것이다.

금속활자의 기원설

금속활자 인쇄술을 처음으로 발명한 민족은 바로 우리 민족이다.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일찍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과 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금속활자 인쇄술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분분하다.

1) 문종조 기원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이 문종조(1047~1083)에 기원되었다는 학설은 김부식의『고려국오관산대화엄영통사증시대각국사비명병서』에 나타나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신미(1091)년 봄에 남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수색하여 구한 서적이 무려 4천 권이었다. 한결같이 먼지가 쌓이고 좀이 썰어 편간이 산락되었으나, 일일이 수습하고 포궤해 온 것들이었다. 흥왕사에 교장사를 설치하고 명류들을 불러 오류를 간정할 것을 청원하여 연참(鉛?)을 주상하니, 1년도 채 못되어 문적이 크게 완비되었으며 학자들에게도 크나큰 혜택을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기원설은 문장의 ‘오류를 바로잡아 판각한다’ 는 의미의 ‘연참’을 ‘연판’, ‘연확자판’, ‘금속활자판’ 등 임의적으로 확대하여 해석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인 것이다.

2) 숙종조 기원설

우리 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이 숙종조에 기원되었다는 종래의 학설은 『고려사절요』숙종7년(1102)12월의 기사에 근거한 것이다.

백성들의 풍요와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전화보다 더 막중한 것이 없는 바, 서북의 양조에서 이를 시행한 지 이미 오래이나 우리나라만은 아직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바이다. 이제 비로소 고주법으로 필요한 주전 1만 5천 관을 만들어 재추?문무양반ㆍ군인 등에게 분사하여 그 권여로 삼고자 하는 바, 그 전문을 ‘해동통보’ 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바를 태묘에 고하도록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간직되어 있는 고려 『복(?)』활자의 금속성분이 구리 50.9%, 아연0.7%, 주석 28.5%, 납 10.2%, 철 2.2%등으로 되어 있어 ‘해동통보’의 금속 성분과 거의 같다는 것을 그 증거로 들고 있다. 이는 주전의 고주법을 임의적으로 금속활자의 고주법으로 간주하고, 우연하게 고려 『복(?)』활자와 ‘해동통보’의 금속성분이 거의 비슷한 점을 두고 주조연대를 추정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이다.

3) 1120년대 기원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이 12세기 중엽(1120)에 기원되었다는 종래의 학설은 15세기 전반기의 활자본인 『고문진보대전』의 권말에 있는 2개의 소장인 중의 하나를 ‘이녕보장’으로 잘못 판독해, 그가 고려 인종 2년(1124)에 송 휘종에게 『예성강도』를 바친 인물이라는 점에서 ‘금속활자 주조 기술의 발달 상태와 활자 발명의 시기로 보아 잘 맞는 사람’으로 판단한 데에서 그 기원을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고문진보대전』은 ①남송 말기 또는 원대 말기의 사람인 황견과 진역 등에 의해서 편찬된 것으로 그 시기가 대체적으로 원대 초기라는 점,② 전록생이 공민왕 14년(1365)원에 사신으로 갔을 때 구입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라는 점,③『고문진보대전』이라는 서명 중에서 ‘대전’은 조선 세종 32년(1450)에 중국의 사신 예겸이 『상설고문진보대전』을 전래한 후에 쓰여진 명칭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5세기 중엽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 1297년 기원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이 충렬왕 23년(1297)에 기원되었다는 학설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량답순종심요법문』(5장)의 권말에 간행자로 나타나는 ‘별불화’라는 중국인이 고려 충선왕과 함께 원의 무왕을 옹립한 사실이 있다는 점과 그가 충렬왕 23년 (1297) 무렵에 중국의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이 충렬왕 23년(1297)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의 기원연대로 주장한 것이다.

5) 1230년대 이전 기원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이 1230년대 이전에 기원되었다는 학설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신인상정예문발미 대진양공행’ 조에 나타나는 기록, 영가대사가 저술한 『증도가』에 남명 법천선사가 계송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권말에 나타나는 기록,『불조직지심체요절』 권말의 간기에 나타나는 기록, 정도전의 『삼봉집』 ‘치서적포시병서’ 조에 나타나는 기록,『고려사』 ‘백관지’ 의 서적원에 관련된 기록 등에 근거한 것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학설로 인정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 기원의 학설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은 고려시대 말기에 이미 실용되고 있었음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금속활자 인쇄가 계속하여 행하여진 결과 공양왕 4년(1392)에 금속활자 인쇄출판 업무를 전담하기 위한 서적원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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