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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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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刻字 )는 나무나 돌 등의 각종 재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
각자는 삶의 자취를 남기고자 노력했던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다 . 인류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바위나 동굴에 일상의 모습이나 기원을 그림으로 새겨 놓아 , 많은 수의 암각화와 동굴 벽화를 남겼다 . 이후 문자가 발명되면서 그림 대신에 문자를 새기는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고 더불어 각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종이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기 이전의 기록은 돌이나 나무 , 청동기 , 토기 등에 글자를 새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
우리나라 각자의 역사도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각자 유물로는 중국 집안현 (集安縣)의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중원 고구려비 ,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 , 단양 적성비 , 남산 신성비 , 울진 보평비.냉수리비 , 백제의 무령왕릉 매지권 등이 있다.

그리고 연가 7년 (延嘉七年 :539)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고구려의 금동여래입상과 고려 초기 금판경첩 등은 금문류 (金文類) 각자 문화의 찬란함을 전해 주고 있다 . 이러한 유물들은 후대의 목판 인쇄와 연결된다 .
각자 (刻字 ) 문화는 종이와 먹의 발달과 함께 인쇄로 발전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닥종이(楮紙)는 두껍고 질겨서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우리 나라 종이를 중국에서는 계림지 또는 백추지라 불렸으며, 희고 질기며 윤기가 나기 때문에 중국에서 많이 수입하였다.
인쇄 자료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먹이다 . 1988년 경남 의창 다호리 원삼국시대 고분에서 BC 2세기경의 붓 다섯 자루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먹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조판 인쇄의 필수 재료인 먹과 종이의 사용이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진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각자의 역사 또한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국보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 국보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의 비문
  •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의 비문
  • 국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앞면
  • 국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앞면
  • 국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뒷면
  • 국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뒷면
우리나라 인쇄 문화는 목판 인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목판 인쇄가 어느 시기부터 비롯되었는지 정확한 역사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 2층 탑신부 (塔身部 ) 사리공 (舍利空)에 봉안되었던 금동사리외함 (金銅舍利外含)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 보아 적어도 8세기 중엽에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닥종이 12장을 이어 붙인 두루말이 형태로, 각 행에 7~9자의 글자를 새긴 소형 목판본이다. 간행된 시기는 751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 한편 최치원이 지은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에 신라에서 당나라의 사신에게 시집 (詩集)을 인쇄하여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 신라 시대 목판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 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 인쇄가 더욱 발달하였다.
  •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해인사 소장) 탁본
  •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해인사 소장) 탁본
  •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해인사 소장)
  • 국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해인사 소장)

당시에는 사찰마다 각자(刻字)를 전문으로 하는 승려 각수(刻手)들이 있었고, 이들은 종교적 정성과 공양심으로 각자를 하여 뛰어난 인쇄 문화를 꽃피웠다 .
현존하는 우리 나라 판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해인사의<팔만대장경판>이다.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大藏都監)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여,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해 완성하였다. 이 대장경판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경판이며,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판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렇듯 고려 시대에는 신라의 목판 인쇄술을 계승하여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 인쇄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 그리하여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과 의학 서적 및 개인의 시·문·집·역사서 등 각 분야의 책들도 목판 인쇄의 발달에 힘입어 널리 간행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목판 인쇄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특히 초기에는 왕실의 보호 아래 불교 경전 간행이 이루어져, 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불교 경전을 간행하였다. 불교 경전 이외에도『훈민정음』·『삼국사기』·『삼국유사』·『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목판으로 찍어냈다 .

조선 시대 목판 인쇄는 중앙의 정부 차원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 각 지방의 관아에서 관장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 또한 개인의 문집이나 조상들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기 위하여 사가(私家)에서 목판 인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 그리고 외교적으로 일본의 요구에 따라 사신을 통해 여러 차례 우리 목판본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

그런데 고려 시대 이후로 금속활자 인쇄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목판 인쇄가 더 많이 성행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목판은 활자본과 달리 한번 새겨 놓으면 간행량에 제한을 받지 않고 무한정 찍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목판을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 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던 것이다.

  • 국보 훈민정음 (간송미술관 소장)
  • 국보 훈민정음 (간송미술관 소장)
  • 국보 훈민정음 (간송미술관 소장)
  • 국보 훈민정음 (간송미술관 소장)
  • 국보 삼국사기<권1~50>
  • 국보 삼국사기<권1~50>
  • 국보 삼국유사<권3~5>
  • 국보 삼국유사<권3~5>

한편 각종 궁궐의 건물이나 사찰·사가의 건축물에도 나무에 글자를 새겨 현판(懸板)을 거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건축물에는 현판이 걸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각을 하는 작업 역시 각자장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목판 각자의 정교함이 매우 떨어지는데, 복각(覆刻)이나 지방 사간본(私刊本)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목판 인쇄술을 대신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목판 인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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