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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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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기원

나무활자 인쇄

나무활자 인쇄에 관한 초기의 기사는 북송 때 필승이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의 설명 가운데 나타난다. 나무로 활자를 만들면 나무결에 조밀의 차이가 있어 물에 젖을 때 높고 낮음의 차가 생겨 활자면이 고르지 않고, 또 조판할 때 점착성 물질과 서로 고착되어 떼내기 어렵기 때문에 흙으로 빚어 구운 활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원나라의 왕정(王禎)이 1298년에 목활자 3만여개를 만들어 자신이 편찬한 『정덕현지(旌德縣志)』를 찍어냈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을 지어 자기의 저서인 『농서(農書)』의 권말에 붙였다. 그 중에 목활자의 제작, 조판 및 인출법에 관한 것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목활자의 형태 높은목활자, 지방목활자, 중간목활자
높은목활자 지방 목활자 중간목활자
높은목활자
<서울대 규장각 소장>
지방 목활자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간목활자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그 뒤 동양의 목활자 보급 및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목활자가 언제 만들어져 사용되었는지 전하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 말기인 1377년에 흥덕사(興德寺)에서 찍어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를 보면 활자의 부족을 목활자로 충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나라도 일찍부터 목활자가 인쇄에 쓰여졌고, 금속활자로 인쇄할 때에는 벽자와 보죽자를 손쉽게 나무에 새겨 보충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국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록권-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활자본류
  • <국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활자본류]>

조선시대의 초기는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한 상태에서 사회 및 경제 질서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긴요한 자료를 손쉽게 목활자로 찍어 그 수요를 충당하였다. 1395년 서적원에서 인출의 『대명율직해(大明律直解)』가 백주지사(白洲知事) 서찬(徐贊)이 만들어 바친 목활자로 찍어냈고, 1395∼97년 공신도감 인출의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願從功臣錄券)』들이 역시 목활자로 찍혀졌음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목활자발달

세종 때부터 정교롭게 발달하기 시작

목활자의 인쇄술이 정교롭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였다. 1448년에 찍어 반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은 목활자로 찍었는데, 그 새김이 정교하여 한자 활자는 진양대군유(晋陽大君)의 필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목개자(墨蓋子)의 음문(陰文)은 안평대군용(安平大君 瑢)의 글자체를 방불케 한다는 평이다.

  • 국보 동국정운1질
  • <국보 동국정운1질 (본문의 큰 글자는 목활자,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

1455년에 찍어낸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도 모두 목활자이며, 관서에서 만든 활자이기 때문에 정교하여 인쇄가 매우 깨끗하다. 1495년에 대비들이 승하한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각사에서 불경을 대대적으로 간행하고 똑 같은 내용의 발문을 목활자로 찍어 개개의 책 끝에 붙였는데, 그 목활자 인쇄는 참으로 우아 정교하다. 대비들은 임금이 내주는 내탕(內帑)으로 계속 목활자를 만들어냈다. 이를 '인경자'(印經字)라 일컫고 있으며, 한자와 한글자가 각각 만들어졌다. 금속활자로 여길 만큼 정교하다.

  • 보물  홍무정운역훈
  • <보물 홍무정운역훈 (한글과 한자, 큰 글자는 목활자로, 작은 글자는 갑인자)>
임진왜란 전후

위에서 살펴 본 바는 금속활자 인쇄가 성행되던 시기에 나라와 왕실이 특정 목적 과 한정된 이용을 위하여 손쉽게 만들어 쓴 목활자 인쇄의 사례이다. 나라와 왕실이 주관한 목활자인쇄이기 때문에 그 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임진왜란의 발발로 금속활자 인쇄의 기능이 마비되고, 한 동전적으로 목활자 인쇄가 이루어졌다. 그 시기는 1668년에 '무신자'(戊申字)가 조조되어 금속활자 인쇄를 복구하기까지 7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목활자 인쇄는 훈련도감이 자급자족의 한 방편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판데서 비롯하여 지속되었는데, 이를 '훈련도감자'라 일컬었다. 그 글자체는 갑인자체, 경오자체, 을해자체, 갑진자체, 병자자체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되었다.

  • 보물 오운 종가 문적 노주연 송덕시 (훈련도감 갑인자체)
  • <보물 오운 종가 문적 노주연 송덕시 (훈련도감 갑인자체)>

그리고 1636년의 병자호란이 끝나고 세태가 점차로 회복된 인조 말기부터는 나라의 인쇄사업이 다시 교서관(校書館)으로 돌아 왔다. 그렇지만 그것도 엮시 목활자에 의한 인쇄였으며,이를 임진직후의 '교서관 목활자'라 일컫고 있다. 임진란후에는 그밖에도 '실록자'가 나무로 만들어져 역대실록을 비롯한 「선조실록」,「인조실록」,「효종실록」이 찍혀지고, 공신도감에서도 목활자로 녹권과 회맹록등을 찍어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후 한동안 목활자인쇄로 일국의 인쇄사업이 진행되었지만, 그 기술은 활자 제작이 거칠고 깨끗하지 못하여 아류의 평을 받고 있다.

  • 보물 밀성박씨삼우정파종중소장문적선무원종공신록권본문(박지남) - 공신도감자
  • <보물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고문서 선무원종공신록권본문(박지남) - 공신도감자>
조선후기 민간속으로...

목활자 인쇄는 금속활자인쇄가 복구된 1668년 이후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병행되었다. 각종의 인서체와 필서체 계통의 크고 작은 목활자가 다양하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목활자는 관서뿐만 아니라 사찰 서원과 같은 사사로운 단체와 개인 그리고 민간인들이 또한 다양하게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 사찰의 목활자본으로는 15세기 중엽 무렵의 불교서적들이 전해지고, 서원 및 사가의 목활자본으로는 16세기의 것을 비롯한 그 이후의 것들이 전래되고 있다. 이들 활자는 관주활자인 갑인자, 을해자, 을유자, 갑진자. 병자자등의 글자체를 본 따거나 독자적인 필서체를 자본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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