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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유적

양주 회암사지 유적
사진출처-양주시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불교 선종의 수행과 생활을 위한 규범인 청규에 따라 조성한 사원의 배치와 형태가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불교 사원 유적이다. 회암사지에서 확인된 고고학적 증거는 14세기에 만개했던 선종의 동아시아적 유행과 수행 전통, 청규에 기반한 선종사원의 공간 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신청유산은 한반도 중부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다. 발굴조사(1997~2019)에서 70동의 건물지가 확인된 중심사역과 회암사를 중흥으로 이끌었던 고승들의 기념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종사원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14세기 고려 말(1374~1376)에 조성되어 조선 전기 왕실에 의해 수차례의 수리 보수를 거치며 운영되었으며, 16세기 말 폐사된 이후에도 그 터가 온전히 남아 중창 당시의 배치와 형태를 현재까지 거의 유지해왔음이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선종은 참선을 통해 스스로 부처임을 깨닫는 것을 종지로 삼는 불교의 종파로, 선종사원에서는 수행과 일상이 합일되는 수행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사원 내에서 지켜야 할 규범이 매우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종사원에서는 청규(淸規)라는 선원의 규칙이 제정되었다. 청규는 선종 교단의 조직과 수행에 필요한 규칙들을 체계화시켜 문자로 남긴 것으로 당나라 때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가 처음 만들었으며, 주요 내용은 선원에서의 의식주 생활, 수행법, 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남송(1127~1279)대에 청규가 본격적으로 간행‧보급되면서, 청규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사원제도가 정립되었다.

회암사는 12세기(1174년)부터 이미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만, 선종사원으로써 공간 구성 체계의 틀을 갖춘 것은 14세기 말(1374~1376) 나옹의 중창을 통해서이다. 나옹은 승가의 순수성 회복을 위해 청규의 정신을 강조하였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던 청규에 기반을 둔 선종의 사원제도를 회암사에 적용하였다.

사원의 중심 영역에는 불전과 함께 스승으로부터의 문답이 이루어지는 법당, 선원의 최고책임자가 주석하는 방장, 선종의 계보를 잇는 조사들을 배향한 조사당・영당 등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 좌우로는 선승들의 집단 수행공간과 생활 복합시설이 위치하였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선종사원 내에서 승려들이 수행 생활을 함에 있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청규의 실행 공간을 구현한 것이었다.

15~16세기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왕실 구성원의 명복이나 현세적 축복을 빌기 위한 왕실의 축원사찰로 기능이 확대되었다. 회암사는 불교를 중시했던 고려 왕조가 유교를 근간으로 한 조선 왕조로 변화되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례적으로 번성했던 왕실사찰로 부각되었다.

회암사가 조선의 대표적인 왕실사찰로 부각됨에 따라 일부 건물의 용도가 변경되고 대형 법회를 위한 시설물이 추가되었지만, 회암사는 여전히 선승들을 위한 수행도량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유교 중심의 정치가 본격화되고 왕실사찰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사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폐사되었다.

세계유산적 가치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이다. 이 고고학 유적지는 불교 선종의 수행 전통, 사원의 공간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 (ⅲ) 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인 증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