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문화유산 제--호 기사진표리진찬의궤
(己巳進表裏進饌儀軌)

[ 번역 해제 ]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1809년(순조 9) 1월 22일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순조(純祖)가 혜경궁(惠慶宮)에게 전문(箋文)과 치사(致詞), 표리(表裏)를 올리고, 2월 27일에 혜경궁에게 진찬(珍饌)을 올린 행사를 정리한 의궤이다. 순조는 1808년 연말에 이 행사를 거행할 것을 명령하면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말고 예조(禮曹)에서 전담하여 일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이 행사는 예조에서 주관했다. 1. 행사 주인공과 저술 배경 (1) 행사의 주인공 행사의 주인공은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1735~1815)이다. 혜경궁은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둘째 딸이며, 어머니는 황해관찰사를 역임한 이집(李潗)의 딸이었다. 혜경궁은 1735년(영조 11) 6월 18일에 한양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1743년 11월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1744년 1월 11일에 가례를 거행하였고,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1월 22일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입궁(入宮)하였다. 1750년에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지만 3세에 요절하였고, 1752년에 정조를 낳았다. 1762년 윤5월에 사도세자가 사망하면서 친정으로 쫓겨 나갔다가 얼마 후 궁궐로 돌아왔다. 이 때 영조는 가효당(嘉孝堂)이란 편액을 써 주고 혜빈(惠嬪)이란 칭호를 내렸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3월에 혜경궁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1795년 윤2월에는 정조와 함께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방문하고 화성 행궁에서 회갑 잔치를, 본인의 생일인 6월 18일에 창덕궁 연희당(延禧堂)에서 회갑 잔치를 하였다.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고 벽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죽임을 당했고, 1804년 손자인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면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1804년 1월에 혜경궁은 세자빈에 책봉된 지 60주년이자 7순(旬)이 되는 해를 맞아 진하(陳賀)를 받았고, 1809년에 관례를 거행한 지 60주년을 맞아 진찬(進饌)을 받았다. 1815년 12월 15일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고, 1816년 3월 3일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시호는 헌경(獻敬)이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10월에 왕후로 추존되어 능호가 융릉(隆陵)이 되었고, 그해 11월에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⑵ 저술 배경 이 책은 1809년에 혜경궁의 관례 6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거행한 후 작성한 의궤이다. 진찬 다음날인 1809년 2월 28일에 순조는 승지 박종훈(朴宗薰)에게 1795년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범례를 따라 의궤를 작성하라고 지시했고, 3월 17일에 승지 홍석주(洪奭周)는 의궤 이름을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로 하겠다고 보고하여 순조의 허락을 받았다. 의궤는 내각(內閣, 규장각)에서 편찬하였고, 3월 22일에 혜경궁에게 의궤 1건이, 3월 23일에 순조에게 의궤 1건이 올려졌다. 2. 서지 사항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1책(97장)이며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British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표지는 청색 비단이고 제첨은 흰색 비단에 “己巳進表裏進饌儀軌 全”이라 기록하였다. 책을 묶을 때 놋쇠 물림에 원환(圓環), 5개의 박을정(朴乙丁), 국화동(菊花童)을 사용하였고, 본문에는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기록하여 의람용 의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기록에 의하면 세로 47cm이며, 1891년 10월 2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 책은 본문에 오자(誤字)가 있으면 해당 부분을 도려내고 종이를 덧대어 깨끗하게 정사(正寫)했다. 3. 체제와 내용 ⑴ 체제 책의 권수(卷首)에 수록된 목차를 보면 택일(擇日), 좌목(座目), 도식(圖式), 전교(傳敎), 연설(筵說), 악장(樂章), 치사(致詞), 전문(箋文), 의주(儀註), 계사(啓辭) 부계목(附啓目),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 찬품(饌品) 부채화(附菜花), 기용(器用), 배설(排設), 의장(儀仗), 참반(參班), 의위(儀衛), 공령(工伶), 상전(賞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19세기에 작성된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전형적인 체제이다. ⑵ 내용 택일(擇日) 택일에서는 각 행사를 거행한 일자가 정리되어 있다. 1809년 1월 10일에 순조는 희정당(熙政堂)에서 전문, 치사, 표리를 올리는 의식을 연습했다. 1월 22일에는 순조는 경춘전에서 전문, 치사, 표리를 직접 올렸고, 2월 27일에는 경춘전에서 진찬을 거행했다. 좌목(座目) 좌목은 행사를 집행하는 실무를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이다. 표리 등을 올리는 행사는 예조에서 주관했다. 도식(圖式) 도식에는 경춘전도(景春殿圖), 진표리도(進表裏圖), 진찬전내도(進饌殿內圖), 서보계도(西補階圖), 동보계도(東補階圖), 등가도(登歌圖), 헌가도(軒架圖), 진표리도, 진찬도, 전내도(殿內圖), 서보계도, 동보계도, 등가도, 헌가도, 채화도(菜花圖), 기용도(器用圖), 의장도(儀仗圖), 악기도(樂器圖), 복식도(服飾圖)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교(傳敎) 전교는 행사와 관련한 국왕의 명령을 정리한 것으로, 1808년 12월 1일부터 1809년 3월 19일까지 기록이다. 연설(筵說) 연설은 국왕이 신하를 만나 명령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1808년 12월 1일부터 1809년 2월 2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악장(樂章) 악장은 의식에 사용된 악장으로 진찬 때 먼저 부르는 선창악장(先唱樂章)과 뒤에 부르는 후창악장(後唱樂章)이 있다. 이는 모두 규장각 검교직각(檢校直閣)이던 심상규가 작성하였다. 치사(致詞) 치사는 표리 등을 올리고 진찬을 거행하는 행사에서 왕대비와 혜경궁의 덕을 찬양하여 올린 문서를 말한다. 전문(箋文) 전문은 1월 22일에 혜경궁에게 표리 등을 올릴 때 함께 올린 축하의 글이다. 여기에는 순조가 올린 전문과 의빈이 올린 전문이 있고, 척신이 올린 전문은 의빈 것과 같다고 했다. 의주(儀註) 의주는 행사의 의식 절차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참석자의 자리 배치, 의장 및 기물(器物)의 배치, 참석자의 움직임, 연주 음악과 무용을 수록하였다. 계사(啓辭) 부계목(附啓目) 계사와 계목은 행사를 주관한 예조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를 말한다. 이를 보면 혜경궁이 볼 수 있도록 진찬 의주(儀註)를 한글로 작성하게 했으며, 진찬일은 처음에는 1809년 3월 10일로 정해졌다가 2월 27일로 바뀌었다. 이문(移文) 행사를 주관했던 예조에서 다른 관청에 보낸 공문서이다. 내관(來關) 내관은 상급 관청이나 동급 관청 사이에 주고받는 공문서로 예조의 이문을 받은 병조와 화성부에서 답변한 것이다. 감결(甘結) 감결은 행사를 주관한 예조에서 하급 관청에 지시한 내용이다. 찬품(饌品) 부채화(附菜花) 찬품은 진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제공된 음식의 재료와 규격을 정리한 것이다. 기용(器用) 기용은 표리 등을 올리고 진찬을 거행할 때 사용된 도구를 정리한 것이다. 배설(排設) 배설은 경춘전에 설치한 물품의 목록을 정리한 것이다. 의장(儀仗) 의장은 표리 등을 올릴 때 혜경궁, 순조, 왕비의 의장과 진찬을 거행할 때 혜경궁, 왕대비, 순조, 왕비의 의장이 정리되어 있다. 참반(參班) 참반은 표리 등을 올릴 때와 진찬을 거행할 때 참여한 의빈과 척신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의위(儀衛) 의위는 행사를 보조하는 인원들이 배치된 상황과 각각의 업무를 정리한 것이다. 공령(工伶) 공령은 행사에 참여한 악공(樂工)과 의장(儀仗)을 들었던 차비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상전(賞典) 상전은 행사에 참여한 인물을 시상한 내용이다. 4. 자료의 가치 ⑴ 서지적 가치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어람용 2건이 제작되어 혜경궁과 순조에게 올렸고 이는 모두 외규장각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별도로 순조는 규장각에도 1건을 보관하라고 명령했지만 이 의궤가 만들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856년에 작성된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을 보면, 1건은 1839년에 대교(待敎) 남병철(南秉哲)이 외규장각에 봉안했고, 다른 1건은 1856년에 검교제학(檢校提學) 김병기(金炳冀)가 외규장각에 봉안했다. 따라서 외규장각에 있던 2건의 의궤 가운데 1건이 현재 대영도서관에 있고, 나머지 1건은 1866년 병인양요 때 불타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필사본으로 작성된 어람용 의궤의 유일본이다. 이와 별도로 장서각에 《혜경궁진찬소의궤(惠慶宮進饌所儀軌)》 1책(64장)이 있다. 이는 본문의 판심에 “禮曹上”으로 인쇄된 용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행사를 주관했던 예조에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체제는 목록, 좌목, 전교, 계사, 이문, 내관, 의주, 감결, 상전으로만 구성되어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체제보다 소략하고, 의궤의 백미라 할 도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혜경궁진찬소의궤》에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에 보이지 않는 기록이 나타나므로 두 책을 대조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⑵ 내용적 가치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1809년 관례 60주년을 맞이한 혜경궁을 위해 거행한 두 가지 행사를 기록한 유일한 의궤이다. 이 의궤는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과 행사 참석자, 행사의 절차, 행사의 소요된 물품의 내역과 경비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행사를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의궤의 백미는 49면으로 이루어진 도식에 있다. 도식은 참석자 및 의장의 위치를 문자로 표시한 도식과 실제 형상을 천연색으로 그리고 문자를 기록한 도식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천연색 그림은 의궤 최고의 수준이다. 가령 혜경궁에게 진찬을 올리는 진찬도를 보면 혜경궁의 좌석 뒤에 세워진 병풍의 그림까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이 상세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의궤의 도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정조 대에 작성된 것으로 최고의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목판으로 찍은 그림이기에 흑백으로만 나타난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도식은 정조 대에 작성된 의궤의 도식에 필적하는 수준이면서 천연색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유일한 가치를 가진다. ⑶ 연구사적 가치 영국에 있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오래되었지만 그 전문(全文)이 입수되지 않아 연구가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연구는 임미선이 행사 관련 음악을 검토한 것이 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이후 혜경궁의 지위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이 의궤는 19세기 정치사의 전개와 함께 일어난 혜경궁의 지위 변화, 순조의 혜경궁에 대한 예우, 19세기 왕실 잔치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작성자: 김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