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묘역 석물 鄭昌孫 墓域 石物 경기도 문화재자료 묘역은 무덤의 경계를 정한 곳이고, 석물은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말한다. 정창손의 묘는 연산군 때 무덤이 파헤쳐지는 형벌에 처하면서 묘지와 석물이 훼손되었다. 이후 중종 때 죄가 풀려 묘를 새로 꾸몄다. 1970년 서울 방이동에 있던 묘를 옮겨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이때 따로 묻혀 있던 부인 청주 정씨와 합장하였다. 묘와 석물은 현대에 다시 만든 것인데, 옛 석물 일부는 옮겨 왔다. 누구의 무덤인지 표시하는 무덤 앞의 묘표는 총 2기가 있다. 위가 둥근 형태의 비석은 정창손의 묘표이고,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형태의 머릿돌을 가진 비석은 부인의 것이다. 15~16세기에 만들어진 묘표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문인석은 2쌍이 있는데 돌 표면이 닳은 정도 등으로 볼 때, 아랫단에 있는 문인석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인물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한 신도비는 묘역 아래 입구에 있다. 원래의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에 서거정이 글을 지어 세웠으나 연산군 때 파손되었다. 그 후 외손 이원익이 앞장서서 인조 1년(1623)에 다시 만들었다. 정창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때 「고려사」, 「세종실록」등 주요 국가 책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을 때 도움을 주어 공신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정창손이 죽은 이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쫓아내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시체를 베는 형벌에 처해졌다. 중종 1년(1506)에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되찾았다.
조선 세조와 성종간의 문신인 정창손(鄭昌孫, 1420∼1487) 선생의 묘역이다. 정창손은 1455년(세조 1)에 좌익공신에 올랐다. 봉분은 부인 청주 정씨(淸州鄭氏)와 합장한 하나의 봉분이고 둘레석은 현대의 것이다.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 묘표가 2기 있는데, 1기는 정창손, 다른 1기는 청주 정씨의 묘표이다. 청주 정씨의 묘표는 하엽수방부형(荷葉首方趺形; 뒤집은 연잎을 장식한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으로 연엽의 조각이 깊고 명확한 15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형식이다. 정창손 묘표는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 둥근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으로 16세기 전반기의 형태이다. 문석인은 총 2쌍인데, 모두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문신의 형태)이다. 모두 기둥형의 단순한 신체에 평면적인 조각을 보인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원래 있던 것은 서거정이 찬한 것으로 1504년에 파손되었고, 그후 1623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비문은 한준겸이 서거정의 비문에 추서하여 찬술하고, 심열이 썼다. 그 외 장명등, 석양 등은 현대에 추가한 것이다.
이 묘역은 사육신과 단종복위, 갑자사화 등 여러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의미 깊은 무덤이다. 역사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묘역의 석물이 철거되고 개장되면서 다시 세워진 사연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크다.
정창손 묘역 석물 鄭昌孫 墓域 石物 경기도 문화재자료 묘역은 무덤의 경계를 정한 곳이고, 석물은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말한다. 정창손의 묘는 연산군 때 무덤이 파헤쳐지는 형벌에 처하면서 묘지와 석물이 훼손되었다. 이후 중종 때 죄가 풀려 묘를 새로 꾸몄다. 1970년 서울 방이동에 있던 묘를 옮겨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이때 따로 묻혀 있던 부인 청주 정씨와 합장하였다. 묘와 석물은 현대에 다시 만든 것인데, 옛 석물 일부는 옮겨 왔다. 누구의 무덤인지 표시하는 무덤 앞의 묘표는 총 2기가 있다. 위가 둥근 형태의 비석은 정창손의 묘표이고,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형태의 머릿돌을 가진 비석은 부인의 것이다. 15~16세기에 만들어진 묘표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문인석은 2쌍이 있는데 돌 표면이 닳은 정도 등으로 볼 때, 아랫단에 있는 문인석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인물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한 신도비는 묘역 아래 입구에 있다. 원래의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에 서거정이 글을 지어 세웠으나 연산군 때 파손되었다. 그 후 외손 이원익이 앞장서서 인조 1년(1623)에 다시 만들었다. 정창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때 「고려사」, 「세종실록」등 주요 국가 책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을 때 도움을 주어 공신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정창손이 죽은 이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쫓아내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시체를 베는 형벌에 처해졌다. 중종 1년(1506)에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되찾았다.
조선 세조와 성종간의 문신인 정창손(鄭昌孫, 1420∼1487) 선생의 묘역이다. 정창손은 1455년(세조 1)에 좌익공신에 올랐다. 봉분은 부인 청주 정씨(淸州鄭氏)와 합장한 하나의 봉분이고 둘레석은 현대의 것이다.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 묘표가 2기 있는데, 1기는 정창손, 다른 1기는 청주 정씨의 묘표이다. 청주 정씨의 묘표는 하엽수방부형(荷葉首方趺形; 뒤집은 연잎을 장식한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으로 연엽의 조각이 깊고 명확한 15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형식이다. 정창손 묘표는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 둥근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으로 16세기 전반기의 형태이다. 문석인은 총 2쌍인데, 모두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문신의 형태)이다. 모두 기둥형의 단순한 신체에 평면적인 조각을 보인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원래 있던 것은 서거정이 찬한 것으로 1504년에 파손되었고, 그후 1623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비문은 한준겸이 서거정의 비문에 추서하여 찬술하고, 심열이 썼다. 그 외 장명등, 석양 등은 현대에 추가한 것이다.
이 묘역은 사육신과 단종복위, 갑자사화 등 여러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의미 깊은 무덤이다. 역사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묘역의 석물이 철거되고 개장되면서 다시 세워진 사연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크다.
This is the cemetery of Jeong Chang-son (1420-1487), a civic official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and King Seongjong of the Joseon period. In 1455 (1st year of King Sejo’s reign), Jeong was appointed to the post of jwaikgongsin for helping King Sejo ascend to the throne. This tomb has a single burial mound jointly buried with his wife of Cheongju Jeong Clan and the surrounding stones are modern. There are two myopyo (grave marking stone) on the right side of the front of the burial mound, one belongs to Jeong Chang-son while the other belongs to Lade Jeong of Cheongju. The grave marking stone of Lady Jeong of Cheongju is in the hayeopsubangbu (stele with a head stone decorated with flipped-over lotus leaves and square supporting stone) with deep and clear lotus leaves sculpted in the representative style of the late 15th century. The grave marking stone of Jeong Chang-son is in the wonsubangbu (stele with round head stone and square supporting stone) style of the early 16th century. There is a pair of muninseok (stone figure) and both are in the bokdugongbok (civic officer wearing the official hat and robe). All have a simple column type body and flat sculptures. There is a stele at the entrance of the cemetery. The original one made by Seogeojeong was destroyed in 1504, and reconstructed in 1623. The epitaph consists of Seogeojeong’s epitaph plus additional writing in the Chusa style by Han Jeon-gyeom and inscription written by Sim Yeol. In addition, the jangmyeongdeung (stone lantern) and seokyang (stone sheep) were added in modern times. This cemetery is significant because it has connections to various historical events such as the six martyred ministers, restoration of King Danjong and Massacre of Gapja. The abolition and opening of the stone structures before the cemetery reflect the historical events and holds high value as cultural heritage.
此处是朝鲜世祖和成宗时期文臣郑昌孙(1420年∼1487年)先生的墓域。1455年(世祖1年)郑昌孙被封为左翼功臣。坟包呈单坟形态,与其夫人清州郑氏合葬,围石为现代所立。坟包的正面右侧立有两座墓表,其中一座是郑昌孙的墓表,另一座是清州郑氏的墓表。清州郑氏的墓表呈荷叶首方趺形(饰有翻转荷叶的碑首和方形底座的石碑形态),荷叶雕刻深且分明,系15世纪后期的代表性风格。郑昌孙的墓表呈圆首方趺形(圆形碑首和方形底座的石碑形态),系16世纪前期的形态。文石人共有两对,均呈幞头公服形(头戴幞头、身穿公服的文臣形态)。身体均为简单的石柱型,上面有平面式雕刻。墓域入口处立有神道碑,原来的碑文由徐居正所撰,1504年被损坏,之后于1623年重建。碑文是由韩浚谦在徐居正所撰碑文的基础上补撰的,由沈悦所写。此外,长明灯、石羊等是现代新建的。 该墓域与死六臣、端宗复位及甲子士祸等多个历史事件有关,因此具有重大历史意义。由于历史原因,墓域的石雕曾被拆除,后于开放时重建,该墓域很好地展示了这段历史变故,因此具有很高的文物价值。
朝鮮時代、世祖と成宗の時期の文官であるチョン・チャンソン(鄭昌孫、1420~1487)の墓域。チョン(鄭)は1455(世祖1)年に佐翼功臣になった。墳丘は夫人清州鄭氏と合葬した1つの墳丘で、外護列石は現代のものである。墳丘の正面右側に墓標が2基あり、1基はチョン・チャンソン(鄭昌孫)、もう1基は清州鄭氏のものだ。清州鄭氏の墓標は荷葉首方趺形(裏返した蓮の葉を飾った頭石と四角い台石がある碑石の形態)で、蓮葉の彫刻が深く明確な15世紀後半の代表的な様式である。チョン・チャンソン(鄭昌孫)の墓標は円首方趺形(丸い頭石と四角い台石がある碑石の形態)で、16世紀前半期の形をしている。文石人全部で2組あり、すべて幞頭公服形(頭には幞頭をかぶり、公服を着た文官の形)だ。これらはいずれも柱型の単純な身体に平面的な彫刻になっている。墓域の入り口には神道碑があるが、本来あったものはソ・ゴジョン(徐居正)が記した。この神道碑は1504年に破損し、その後1623年に再建された。碑文はハン・ジュンギョム(韓浚謙)がソ・ゴジョン(徐居正)の碑文に勲章を与えた旨を記述し、シム・ヨル(沈悅)が書いた。その他、長明燈や石羊などは現代に追加されたものである。 この墓域は死六臣と端宗復位、甲子士禍などさまざまな歴史的事実と関連している意味深い墓。歴史的事件によって墓域の石造物が撤去され、改葬して再び建てられた事情をよく示しており、文化財としての価値が大き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