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문
창경궁은 남향인 타 궁궐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졌습니다. 1750년(영조 26년)에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기 전 홍화문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었고,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이곳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직접 쌀을 나눠주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궁궐은 나라를 다스리는 법전까지 문이 세 개이지만 창경궁은 궁궐이 들어선 자리가 좁은 지형이기 때문에 홍화문에서 법전까지 문이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옥천교
이곳은 임금이 머무는 법전에 이르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건너라는 공간입니다. 다리는 홍예라 불리는 다리기둥 방식과 돌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리를 받친 기둥에는 도깨비 얼굴을 한 귀면을 조각하고, 상부 난간 엄지기둥에는 서수를 조각하여 물길을 타고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습니다. 다른 궁궐에도 이러한 다리가 있는데, 경복궁은 ‘영제교’, 창덕궁은 ‘금천교’라고 부릅니다.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이 처음 들어설 때 지어진 다리로서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삼도
홍화문에서 명정문에 이르는 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삼도는 임금이 지나가는 중앙의 어도와 문신과 무신이 서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명정문
명정문은 조선시대 당시 홍화문과 명정문 주변에 행각이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법전으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 탄 것을 광해군 때에 재건하여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으뜸 전각입니다. 명정전에서는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 대에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열었습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들이 많았는데, 세조 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등 궁궐의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를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습니다.
문정전
문정전은 명정전과 달리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창경궁에 오셨을 때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하고 업무를 보던 편전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국상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현재 명정전과 문정전 사이에는 천랑이 있고, 과거 문정전 남쪽 방향에도 천랑이 있어 비를 맞지 않고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후에 영조는 자신의 지나침을 뉘우치고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려 다시 세자로 복위시킵니다.
문정문
문정문은 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천랑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 복원하지 못하였지요.
숭문당
숭문당은 학문을 드높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임금과 신하들이 고전에 대한 경연을 펼쳐 지식을 쌓던 곳이지요. 이곳에서 성균관 유학생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1742년(영조 18년) 영조가 숭문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조가 이 당을 세운 것은 대개 문을 숭상하는 뜻에서였다. 지금 내가 그대들을 이 당에서 친히 시험 보이는 것도 문을 숭상하려는 뜻이니 그대들은 이러한 뜻을 깊이 유념하라.˝ 그리고 숭문당 내부에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 쓰인 현판이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를 뜻합니다.
빈양문
빈양문은 정치공간인 외전과 생활공간인 내전을 구분하는 문입니다. 명정전의 뒤편에 위치하지요. 빈양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이 밝음은 곧 임금을 상징합니다.
함인정
함인정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넓은 뜰이 전면에 있어 임금이 많이 사용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임금은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을 만나고, 신하들과 중용∙심경과 같은 고전을 읽으며 경연을 자주 나눴습니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의 함인정은 사방이 트여있지만 19세기 초 궁궐그림인 동궐도에서는 함인정의 삼면이 막혀 있었습니다.
경춘전
경춘전은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와 왕비가 머물던 전각입니다. 처음에는 창경궁을 세운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가 살았었고, 그 이후에도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가 살았습니다. 경춘전은 정조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펼친 지 3년이 된 해 용이 내려오는 태몽을 꿨다고 전해집니다. 사도세자는 용꿈을 꾼 기쁨을 남기기 위해 경춘전 내부 벽에 꿈속의 용을 그려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환경전
환경전은 임금이 창경궁에 오셨을 때 임금의 침전이나 편전으로 사용했습니다. 환경전은 1749년 영민하고 무예에도 출중했던 사도세자가 영조의 대리청정을 명 받은 곳입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였던 사도세자는 부디 대리청정 명을 거둬달라고 하소연 하였지요. 이후 영조의 엄격한 제왕 훈련이 시작됩니다. 또한 중종은 이곳에서 탁월한 의술을 지닌 대장금의 치료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실록에 따르면, 대장금은 대비전과 중궁전에서도 진료를 하였고, 그 공로로 상을 받았습니다.
통명전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의 역할과 동시에 내외명부를 다스리는 업무를 보던 내전의 으뜸 건물 입니다. 역관의 딸이었다가 숙종의 후궁이 된 장희빈이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비가 되기 위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죽은 새나 쥐를 통명전 섬돌 아래에 묻었습니다. 그 무렵 인현왕후도 죽고, 장희빈도 죄가 들통나 사약을 먹고 죽습니다. 이후 숙종은 후궁을 왕비로 승격시키지 못하는 법을 만들도록 명합니다.
양화당
통명전의 동쪽에 있는 전각입니다. 병자호란 때 항복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창경궁 양화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인조는 병이 깊어져 양화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거나 나랏일을 보았습니다. 중국의 사신을 접견할 때는 법전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인조는 양화당에서 사신을 만났지요.
영춘헌
영춘헌은 집복헌 동쪽에 있는 작은 전각입니다. 정조가 임금이 되어 창경궁에 있을 때 살던 곳입니다. 정조는 궁핍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영춘헌 내부에는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고, 비가 새어도 개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28일, 무더운 여름날 종기로 인한 병이 깊어 이곳에서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집복헌
집복헌에서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가 영조11년(1735)에 사도세자를 낳았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는 이곳에서 순조를 낳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출생은 영조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맏아들 효장세자는 이른 나이에 병으로 죽었고, 7년을 기다려 나이 마흔에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지요.
풍기대
창경궁의 풍기대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던 조선시대 유물로 영조 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알아보았지요. 풍기대의 총 높이는 228.1cm입니다. 풍기대는 보물 84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앙부일구
1434년(세종 16년)에 처음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시간과 24절기를 알려주는 해시계입니다.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지요. 창경궁의 해시계는 원래의 것은 아니고 보물 845호를 복제한 것을 놓아 두고 있어요.
성종대왕태실
성종대왕태실은 여러 단계를 거쳐 씻어 성종의 태와 태반을 태항아리에 넣어 봉안한 것입니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왕실 태실 중 성종대왕태실이 가장 외양이 수려해 이왕가박물관이 있던 창경궁에 놔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후손의 태실은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전국에서 길지를 찾아 둥근 봉우리 위에 태를 묻어 보관하였습니다.
내농포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입니다.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으로 내농포이지요. 이곳에서 임금이 직접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습니다. 임금이 솔선해서 농사를 권장하고, 농사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했던 것이지요.
팔각칠층석탑
춘당지 옆에 세워진 팔각7층석탑은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높이 6.5미터의 중국식 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크게 지대석(地臺石) • 기단부(基壇部) • 탑신부(塔身部) • 상륜부(相輪部)로 이루어져 있지요. 지대석과 기단부가 탑신에 비해 매우 높아서 우리나라 전통 탑에서 보이는 균형 잡힌 안정감이 부족합니다.
대온실
춘당지 북쪽에 있는 대온실은 유리 건물입니다. 일본 황실 식물원 담당자였던 일본인 후쿠바 하야토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을 담당하였습니다. 일제가 지은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지만 대온실만큼은 철재와 목재의 뼈대, 유리창을 설치한 최초의 시설물로서 건축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철거가 되지 않았지요. 창경궁 대온실은 일제가 창덕궁에 계신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것입니다. 당시 우리 땅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하여 각종 희귀식물을 전시하였습니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관덕정
관덕정은 대온실에서 성균관으로 연결되는 집춘문으로 가는 길가에 있어요. 1642년(인조 20년)에 세워졌습니다. 관덕정은 활을 쏘던 정자로 알려져 있지요. 앞쪽의 넓은 빈터는 군사훈련과 무과시험장으로 쓰였다고 전해집니다. 인조 20년에 정자를 지어 취미정(翠微亭)이라 부르다가 1664년(헌종 5년)에 이름을 관덕정이라 고쳤다고 합니다.
관천대
1688년(숙종 14년)에 축조된 보물 851호 창경궁 관천대는 대 위에 소간의를 설치하여 천체를 관측하는 시설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해와 달, 별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각과 24절기를 정확히 예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이 존재하였습니다. 관상감이 알려주는 24절기에 따라 백성들은 시기에 맞게 농사를 지었던 것이지요.
선인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선인문이 보입니다. 주로 궐내각사에 근무하는 신하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이문은 조선왕실의 비극과 관련이 많습니다. 중종반정으로 물러난 연산군이 유배를 떠날 때 나간 문이고, 사도세자가 선인문 안쪽 동궁에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인현왕후를 죽게 한 벌로 사약을 마시고 죽은 장희빈도 이 문을 통해 궁을 나갑니다.
월근문
월근문은 홍화문의 북쪽을 따라 걷다보면 만납니다. 월근문은 1779년(정조 3년) 창경궁 홍화문 북쪽 담장에 설치됩니다. 정조가 창경궁 동쪽에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신 경모궁(景慕宮)에 찾아가기 위해 지었습니다. 월근(月覲)은 ˝매달 경모궁에 참배하러 가겠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정조는 죽기까지 24년 동안 거의 매달 한 번 혹은 두 번에 걸쳐 경모궁을 찾았다고 합니다.
자경전 터
통명전 뒤 계단을 따라 언덕 위로 오르면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머물렀던 자경전 터가 나옵니다. 비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신 경모궁이 위치한 언덕이 잘 보이는 높은 곳에 정조는 살아계신 어머니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지요. 왕비가 머무르는 통명전보다 규모도 더 크게 지은 것을 보면 대단한 정조의 효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장서각을 지어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창경궁 복원 계획으로 해체되고 현재는 자경전 터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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