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기원을 담은 이름입니다. 그와 달리 1906년 이름을 고쳐 단 대한문(大漢門)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문의 위치는 처음 자리했던 곳이 아닙니다. 도로 앞쪽으로 33미터 남짓되는 곳이 원래 대한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태평로 길이 크게 뚫리면서 덕수궁 영역의 동쪽 부분이 크게 잠식당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또 다시 궁궐담장 뒤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대한문만 외로이 도로중간에 버려지듯이 서 있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덕수궁에는 원래 남쪽을 향하던 인화문이라는 정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화전을 지으면서 인화문이 철거되자 자연스레 대안문이 정문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대안문’이라는 편액이 처음 내걸린 것은 1899년의 일이었고, 다시 1906년에 ‘대한문’으로 현판을 고쳐 달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은 원래 경운궁으로 불렸으나 1907년 고종이 황제에서 물러나 태황제가 되어 경운궁을 거처로 삼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즉, 경운궁과 덕수궁은 같은 궁궐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금천교
금천교(錦川橋)는 각 궁궐마다 있는 명당수인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신성한 영역을 외부와 구분 짓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각 궁궐마다 하나밖에 없지만 유독 덕수궁에만 두 개의 금천교가 존재합니다. 덕수궁의 원래 정문인 인화문과 연결되었던 금천교가 궁역 확장 중에 사라지고, 대한문과 연결된 현재의 금천교만 현존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금천교는 명성황후의 장례(장의) 행렬 여정에도 등장하는데, 그 위치는 중화전 정전 정4품 품계석 옆 뚫린 구멍 아래로 추정됩니다.
궐내각사 터
궐내각사(闕內各司)는 왕실의 살림을 맡은 관원들이 근무한 관청입니다. 왕실 시중과 궁궐의 시설 관리를 맡는 관리기구 등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궐내각사가 남아있지 않지만 대한제국 당시만 해도 지금의 서울광장 영역까지 존재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덕수궁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헐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중화문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자, 삼조삼문의 내문에 해당됩니다. 1902년 중층 건물로 세워졌으나 1904년 덕수궁대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 재건될 때 함께 지어졌습니다. 중화문 기단부의 답도에 화강암으로 만든 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주로 봉황을 새겨 넣은 다른 궁궐과 차별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중화전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법전입니다. 각 궁궐에는 외전, 내전, 동궁, 후원, 궐내각사가 존재하는데, 외전 중 핵심이 되는 법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임금의 즉위식 혹은 외국의 중요한 사신을 접견할 때 사용되던 공간입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출범 시킬 때 즉조당을 태극전으로 개칭하고 법전으로 사용했지만, 고종 자신이 계획한 근대화 프로젝트들이 성과를 나타내자 1902년 중화전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합니다. 중화전(中和殿)이라는 건물명에는 침략해오는 열강들의 한 가운데에서 대한제국이 중심을 잃지 않고 독립과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광명문
광명문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후, 국장 때 관[재궁梓宮]이 광명문을 통해 나가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크게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고, 1930년대 광명문도 중화전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나중에 광명문 안에 물시계인 자격루와 흥천사명 동종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덕수궁 권역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2018년 12월, 광명문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석어당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의주에서 돌아왔을 무렵 경복궁과 창덕궁이 모두 불타버려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사는 가옥들을 임시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 즉,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석어당은 당시 선조의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이러한 유래로 ˝옛날 임금의 집˝이란 뜻인 석어당(昔御堂)이라는 건물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석어당은 선조가 침전과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승하한 곳이며 또한 광해군에게 유폐 당해 석어당에 갇혀 지냈던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복권하여 광해군을 무릎 꿇리고 죄를 묻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서 깊은 이 건물은 1904년 덕수궁대화재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1905년에 새로이 중건한 석어당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석어당은 원래 민가여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임진왜란의 고통을 잊지 말라는 선조의 가르침에 따라 단청을 칠하지 않았습니다.
즉조당
즉조당은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곳입니다. 영조가 후에 이곳을 들러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계해 즉조당(卽祚堂)’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게 함으로써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계해 즉조당(卽祚堂)’의 뜻은 ‘계해년에 즉위한 임금이 곧 인조’ 라는 뜻입니다. 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온 고종은 덕수궁 내에 마땅한 법전이 없어 즉조당을 덕수궁의 법전으로 삼고 이름을 태극전으로 개명하여 사용합니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한 이후에는 태극전을 원래의 이름인 즉조당으로 개칭합니다. 하지만 이 건물은 1904년 덕수궁대화재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1905년에 새로 중건된 즉조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준명당
준명당은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덕수궁으로 환궁할 당시 새로 지어진 전각입니다. 대한제국 초기에는 고종이 신하나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외부와 연락이 끊긴 고종에게 뒤늦게 덕혜옹주가 태어납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총애하여 그녀를 위해 준명당을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준명(浚明)의 어원은 “다스려 밝힌다”, “다스리는 이치가 밝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준명당은 즉조당과 운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함녕전
함녕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와 만든 침전입니다. 고종은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후 이곳 함녕전에서 쓸쓸히 지내시다가 68세의 일기로 승하하셨습니다. 함녕전은 1904년 덕수궁의 대부분을 태워버린 덕수궁 대화재가 시작된 건물입니다. 함녕전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는데, 이 온돌방의 구들을 수리하고 불을 피우다가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화재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승하하기 전까지 함녕전 동온돌방에서 지내셨습니다.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전국의 백성들이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이는 대규모 항일만세운동,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덕홍전
경효전이 선원전 영역으로 이전을 한 후 지어진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편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효전은 국모가 미우라 고로 공사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당한 후 같은 해 10월 복위되어 국장을 치르면서 설치되었습니다. 1911년 경효전이 선원전 영역으로 이전을 한 후 덕홍전이 재건축됩니다. 덕홍전에는 서양식 조명과 커튼이 설치되었으며 정면의 문도 서양식 판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편전 중에 유일하게 여닫이 문을 설치되어 함녕전과 복도로 연결되었습니다.
정관헌
정관헌은 고종황제가 휴식, 외교관을 접대, 어진을 보관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관헌(靜觀軒)이란 편액은 ‘조용히 보는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관헌의 금속 난간에는 복과 다산을 상징하는 박쥐 문양과 함께 소나무 및 사슴 문양이 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곳에서 순종과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들었습니다. 고종의 뜻에 따라 태조의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유현문
정관헌 서쪽에서 덕홍전 서쪽의 행각까지 예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꽃담이 있습니다. 꽃담에는 정관헌으로 드나드는 유현문이 있습니다. 유현문(惟賢門)은 ˝어진이가 출입하는 문˝이란 뜻으로, 유현문에는 용무늬와 함께 물고기를 입에 문 학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조전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음을 알리는 서양식 황궁입니다. 석조전은 나무, 흙과 같은 조선의 전통 건축 재료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고종은 석조전을 외국 귀빈들을 알현하거나 집무를 보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석조전은 1900년도에 건축을 시작하여 대한제국이 한일강제병합되는 1910년도에 완공되었습니다. 뒤늦게 완공되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실제적으로 제대로 활용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석조전의 정면 상층부에 있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이화문양을 통해 대한제국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자주 이곳을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한반도를 둘로 갈라 놓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중명전
중명전은 처음에는 황실 도서관으로 사용되면서 수옥헌으로 불렸습니다. 수옥헌은 ‘옥을 닦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1904년 고종황제가 덕수궁 대화재를 피해 이곳에 머물게 되었고, 나중에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중명전은 일제식민지의 발판이 되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된 곳입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름이 왜 바꼈을까요? 궁궐 내 건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사용하는 사람과 용무에 따라 달리 이름을 짓습니다. 궁궐 내 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 마지막 자를 전(殿), 당(堂), 합(閤)/각(閣), 재(齋)/헌(軒), 누(樓), 정(亭)의 형식으로 구분하는데 수옥헌의 이름을 지을 때는 왕실 가족의 공무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여 ‘헌’을 사용하였고, 고종이 머물면서 왕, 왕비 또는 상왕 대비, 왕대비 등의 궐 안의 웃어른이 사용하는 건물에 붙는 ‘전’자를 마지막으로 하는 중명전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중명전은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에게 만국평화회의를 가도록 지시한 곳이기도 합니다.
덕수궁 운교
덕수궁과 독일공사관 영역을 연결한 운교(雲橋), 즉 ‘구름다리’입니다. 이를 다르게는 홍교(虹橋) 즉 ‘무지개다리’라고도 부릅니다. 오늘날의 육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자리매김한 이후에도 여전히 좁은 영역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1899년에 미국공사관 서편에 있던 지금의 중명전 권역을 편입한 것을 비롯하여 다시 북쪽으로 수어청 자리인 선원전구역(현 경기여자고등학교 터)을 흡수하였습니다. 여기에다 경운궁 남쪽에 있던 독일영사관 땅을 사들여 크게 궁궐을 확장하려던 계획이 추진됩니다. 1902년에 이 사실이 서울의 외교가에 알려지면서 각국공사관의 외교관들이 도로폐쇄 문제로 반대의 움직임이 일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운교, 즉 육교 형태의 구름다리였습니다. 이 운교는 1903년에 완공되었고, 그 이후 정확히 언제 사라진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덕수궁 남쪽 궁궐 담장의 가운데에 그 당시에 만들어진 석축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돈덕전 터
돈덕전은 크고 화려하여 황제가 신하를 알현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접견소와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외국인과 신하들을 많이 알현한다고 하여 ‘알현관’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세관 건물로 사용되다가 궁 전각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제즉위식도 이곳에서 열렸습니다.돈덕전의 추정 위치는 현재 덕수궁 돌담길 고갯마루 부근입니다. 이 건물은 1901년에 지어져 1920년대초까지 존속했습니다.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양옥 건물로 건물 외곽에는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돈덕전의 순종황제 즉위식을 보도한 당시 신문을 보면 “돈덕전 내부 중앙에는 6개의 대 원주가 선 100평 홀”과 “6본의 대 원주에는 금색의 용이 조각되어 있고, 사벽과 창은 홍색과 황색의 숙수로 치장되고 일단 높은 옥좌와 탁자, 의자 등은 금색 찬란하였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돈덕전 내부에서 많은 행사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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