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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장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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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인장의 기원은 <위서>에 “환인(桓因)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과를 주어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하니 건국과 같이 하였다. 낙랑의 인장은 봉인과 함께 한대의 인장제도를 이어 받은 것으로, 관인으로 보이는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王光之印)’과 ‘신광(臣光)’ 등 2과, 사인으로 ‘왕광화인(王光和印)’이 있다. 그리고 여러 점의 봉니가 남아 있다. 강원도 지방을 통치하였던 ‘예왕지인(穢王之印)’이 출토된 기록이 있고, 삼국시대에도 여러 곳에서 ‘새(璽)’를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삼국의 인장

고구려에서도 국새를 사용한 기록이 있고, 관인으로 사용된 ‘진고구려솔선한백장(晉高句麗率善韓佰長)’ 등과 함께 여러 점의 고구려 인장이 있다.

신라는 문무왕 때 “동(銅)으로 백사(百司) 및 주군인(州郡印)을 주조하였다”는 관인을 주조하여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여러 점의 인장이 남아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인(木印)이나 석인(石印), 함안성산산성, 설봉산성 등에서 출토된 봉인(封印)은 당시 인장의 사용을 말해준다.

백제
는 인장과 기와에 찍은 상당히 많은 수의 인문(印文)이 있다. 대부분 이름과 간지(干支)를 새겨 찍은 것으로 그 형태는 양각원인(陽刻圓印) , 양각방인(陽刻방方印)과 음각방인(白文方印) , 음각원인(陰刻圓印) 등 이다.

신라목인 인면 인문 신라와인 인면 인문 신라동인 인면 인문
고려의 인장

고려때는 요, 금 등에서 고려 임금에게 금인(金印)을 보내왔고, 원에서는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駙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을 보내왔으며, 1370년 명에서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보내 왔으나, 고려의 실정에 맞게 다시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고려는 주조한 청동인이 유명하다.
인문은 알아보기 어렵게 결구가 형상화되었고, 인꼭지의 조각은 여러 가지 금수의 모양을 형상화한 매우 특이한 조각이 많다. 인꼭지가 동물의 형상인 십이지를 비롯하여 사자·해태·잉어·봉황·도깨비·나비·기와모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뉴도 사용하고 있어 천태만상의 자연을 형상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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