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사료로서 의궤의 가치가 주목되면서, 건축, 음악, 식품, 복식사 등 다양한 분과로 연구분야가 확대되었다.
또한 의궤 제작의 배경과 왕실 의례에 대해 주목하는 계기가 되면서 문화사적 연구 역시 심화되고 있다. 한편 약탈 문화재로서 파리에 소장되었던 외규장각 도서가 알려지고 이를 돌려 받고자 하는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대중들의 의궤에 대한 관심과 이해 역시 제고되었다.
의궤란 무엇인가?
의궤란 요즘으로 치면 국가적인 의례나 행사를 치른 후 관련 기록들을 정리한 보고서 혹은 백서 형태의 기록이다. 국가 의례나 행사들 중에서는 상시적으로 행해지는 제사나 의례, 일상적인 수준의 건물이나 악기 수리 등이 있는가 하면 비상시적으로, 혹은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 의례나 행사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국왕 및 왕세자 등의 혼인이나 책봉, 장례, 특별한 경우의 사신 접대, 궁궐의 대대적인 중건 같은 일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에 국가에서는 후대에 참고할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참여한 인원과 들어간 비용들을 모두 정리한 기록을 의궤의 형태로 남겼으며, 이는 후대 비슷한 성격의 행사가 벌어질 때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렇다면 의궤의 이름은 어떻게 구성이 될까? “인열왕후부묘도감의궤”의 예를 들어보자. 의궤의 이름은 보통 “임시 관청 이름+의궤” 혹은 “행사의 종류+의궤”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6조와 같은 기존 관청이 아니라 별도로 00도감(都監), 00청(廳), 00소(所) 등으로 이름이 끝나는 임시 관청이 만들어지곤 하였다. 위 이름의 부묘도감도 이에 해당하니, 위 이름은 곧 인열왕후의 부묘를 담당한 부묘도감의 의궤라는 의미이다. 한편 행사의 종류를 전면에 내세운 경우도 있는데, 기념할 만한 잔치 내용을 담은 “진찬의궤”나 수원 화성의 공사를 정리한 “화성성역의궤”가 대표적이다.
의궤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도설과 함께 장인층까지도 포괄하는 상세한 참여인원의 명단, 다양하고 세세한 물목들 등 기존 편년 사서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아주 구체적인 기록을 담겨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의궤는 조선 시기의 대표적인 기록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2007년 8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반차도 중 부묘 행렬 부분 「인조인열왕후부묘도감의궤」
본 의궤의 내용은 화성행궁의 득중정 축조에
대한 상세내역을 기술하고있다. 「화성성역의궤」
성곽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의 전도 및 분해도 「화성성역의궤」
화성의 4대문 중 하나인 남의 팔달문 「화성성역의궤」
의궤는 왜 제작하였나?
의궤를 제작한 것은 일단은 실용적인 차원에서 전대의 기록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왕의 국장이나 혼례 같은 경우에 “경국대전”이나 “국조오례의”같은 법전과 예서에 기본 사항들은 나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매우 기본적인 내용일 뿐이고 구체적인 행례에 참고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때문에 비상시적으로 행해지는 행사의 경우에는 준비 과정부터 그 마무리까지 자세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비슷한 종류의 행사를 치를 때 참고할 수 자료로 삼게 하였다. 실제 여러 의례나 행사 기록에서는 이전에 치러진 의궤를 참고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참여한 인원들, 사용된 물목들과 비용들을 총 정리함으로써 일종의 결산보고서의 기능까지 수행하였던 것이 의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상징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유교 문화권에서 기록은 역사적 평가를 가능하게 하고 기념비로서 기능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왕의 전횡을 막는 견제수단이 되기도 한 것이 바로 엄정한 기록이었다. 의궤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행사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세밀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정치의 투명성을 담보하겠다는 조선의 지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기록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의궤는 전례가 없이 제작된 의례들이나, 여러 부 반포를 목적으로 제작된 활자본들은 정치적 선전이나 과시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의궤는 이처럼 당대의 문화적 기념비로서 상징적 차원에서 다양한 중층적 의미를 보여준다.
의궤는 언제부터 만들었나?
의궤는 조선의 대표적인 기록문화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불교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고려시기부터 이름이 나오고 있다. 조선 건국 후에도 바로 의궤가 제작된 것으로 보여서, 태조 이성계의 상장례를 담은 “태조강헌대왕상장의궤”나 경복궁을 건설한 내용을 기록한 “경복궁조성도감의궤”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또한 태종의 상장례를 기록한 의궤의 경우에는 3건을 만들어서 사고 등에 봉안하라고 했던 내용도 보여서 조선 초부터 의궤를 제작하고 이를 사고 등에 보관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의궤들은 제작 부수도 많지 않았고, 대부분 서울의 관련 기관에만 보관되었다. 아쉽게도 이들 의궤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소실되어, 현재에는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의궤들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의인왕후 박씨의 빈전과 산릉 관련 의궤들로서 규장각에서 소장 중이다. 이들 의궤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여 고난했던 시대상황을 묵묵히 증언해주고 있다.
1601년(선조 34)에 제작된 의궤들을 필두로 17세기에 제작된 의궤들부터는 국내외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전기에 비할 때 후기에 접어들면서 의궤들은 이전보다 많은 건수가 작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의궤가 그다지 많이 제작되지 않아서 대체로 1~2건 정도가 제작되었으며, 대체로 중앙의 관련부서와 의정부에 분상되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인조대를 거치며 분상본도 4건까지 증가하고, 이후로는 많게는 9건까지 제작되기도 하였다. 분상본이 관련 기관이나 사고에 보관하는 의궤를 말하는 것이라면 국왕의 열람을 목적으로 제작된 의궤도 있는데 이를 어람용 의궤라고 한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한 종의 의궤에 대한 작성 건수가 증가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으며, 의궤의 형식도 정비되어 갔다.
18세기 이후 의궤의 변화
18세기는 여러 가지 문화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그러한 업적이 많이 축적된 시기였다. 의궤의 경우도 여러 모로 변화가 보이는데, 특히 정조대가 그러하였다. 우선 정조가 어람용 의궤를 폐지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정조는 어람건이 궁중에 보관된 휴지에 불과하다며, 보관이 목적이라면 강화도에 두는 것이 낫다고 하여 의궤 어람건을 작성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즉위년에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1782년(정조 6)에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한 이후, 어람용과 동일한 형식으로 고급스럽게 장정한 의궤를 규장각 분상이라 칭하고 서울의 규장각이나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되었다. 강화도에 봉안되었던 어람용 형식의 의궤들은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정조대에는 활자로 제작된 의궤들이 나왔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제작 부수가 많지 않은 의궤는 거의 절대 다수가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원행을묘정리의궤”나 “화성성역의궤” 등이 정리자라는 금속활자로 특별 제작되었다. 이후에도 진연의궤나 진찬의궤처럼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준 의궤들은 활자본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고종대부터는 어람용(규장각본)에 추가하여 세자가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람용(혹은 시강원본)이 추가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예람용도 형식상으로는 어람용과 동일하였다. 어람용과 분상용의 엄밀한 구분에서 보이듯이, 의궤는 책 자체에 예제상의 엄밀한 구분이 적용되어 있었고, 이는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기에 들어 새로운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때에는 황제를 위한 어람용과 황태자를 위한 예람용이 제작되었다.
일제시기에도 고종이나 순종의 국상 등 몇몇 의례들과 관련하여 의궤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관서의 명칭도 주감(主監)으로 바뀌었으며 전통적인 의궤의 형식과는 다르게 제작된 데다 분상용 없이 딱 1건만이 제작되었다.
의궤의 내용 구성
의궤는 의례나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감이나 청, 소 등의 해당 임시 관서의 부설 기관으로 의궤청을 두고, 제작하기 시작한다. 담당 관서와 여러 관서끼리 오고간 문서들을 옮겨 놓은 등록 등의 기초 자료를 모은 다음 의궤 형식에 맞추어 편찬한다. 전체 목차, 도설(그림과 설명), 시일(일정), 좌목(담당자 명단)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각종 공문서들이 이어진다. 임금의 전교나 임금에게 올린 계사, 도감과 다른 기관들끼리 주고 받은 공문서들이 문서 종류별로 정리되어 나오는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후 상전(시상 내역), 의식의 상세한 절차, 들어간 비용과 물품 목록, 장인 명단들이 나오며, 마지막으로 의궤를 제작하는 데 든 비용 및 물목, 절차, 담당자 명단 등이 부록으로 들어가 있다.
이렇게 작성한 의궤는 보통 5~9건을 제작하였으며, 어람용 1건과 나머지 분상용으로 구성되곤 하였다. 그러나 모든 의궤들이 어람용이 작성된 것은 아니어서, 왕실과 관련된 의궤들은 대부분 어람용이 제작되었으나, 실록이나 선원보략 같은 출판 관련 의궤들이나 악기도감처럼 특정 관청에만 관련된 의궤들은 어람용을 제작하지 않았다. 분상용은 전국의 사고와 중앙의 관련 관서들에 분상되었다.
어람용과 분상용의 형식적 차이
어람용의궤
경모궁의궤 (규장각소장)
분상용의궤
사직서의궤 (규장각소장)
의궤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어람용과 분상용이 책의 체제가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우선 표지부터 양자는 확연히 다른데, 어람용은 녹색 비단으로 표지를 감싸고 흰 색 비단에 의궤 제목을 써서 붙인데 비해, 분상용은 홍목면으로 표지를 감싸고 표지에 바로 제목을 기입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어람용(규장각본)은 황색 비단으로, 예람용(시강원본)은 홍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책 오른편에는 세로로 길게 금속을 대어 제본하는 철장을 하였는데, 어람용은 무늬가 새겨진 놋쇠로 한 것에 비해, 분상용은 무늬없는 무쇠 조각을 댔다. 철장을 박는 방식도 달라서 어람용은 다섯 개의 못을 박고 이를 앞과 뒤에서 모두 놋쇠로 된 국화동으로 마무리하였으며, 같은 재질로 가운데에 둥근 고리를 달았다. 이에 비해 분상용은 3개의 두껍고 긴 무쇠 못(박을정)을 사용하였으며, 뒤에서 이를 따로 마감하지는 않았고, 가운데 둥근 고리도 무쇠로 만들었다. 한편 많지는 않지만 실로 제본하는 선장도 있었는데, 다섯 개 구멍을 뚫어서 붉은 실로 꿰었다.
어람용과 분상용은 책 본문의 종이도 차이가 있는데, 어람용이 두껍고 우윳빛이 도는 초주지라는 종이를 쓴 데 비해 분상용은 이보다 얇고 빛깔도 탁한 편인 저주지를 사용하였다. 또한 분상용은 목판으로 인쇄한 검은 색 괘선지에 글씨를 쓴 것에 비해서 어람용은 붉은 색으로 화원이 직접 필사한 괘선에 글씨를 썼다. 비단 표지에 금빛의 놋쇠 변철과 국화동, 우윳빛 종이에 정서되어 가지런한 글씨들, 책장을 넘길 때 나는 그윽한 묵향, 정갈한 도설이나 반차도 등의 그림들 등 어람용은 몇백 년의 간격을 뛰어넘는 탁월함을 전해준다.
어람용의 탁월한 솜씨가 미학적 감동을 준다면, 참고 자료로 활발히 활용되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닳은 분상용은 시간적 격차를 잊게 하는 감회를 준다. 빼곡이 간지를 붙여 무언가 열심히 메모를 해놓은 선인들의 흔적은 과거가 한때 살아 있었음을 무언으로 증명하는 듯하다.